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김태희입니다.
날씨가 추워지고 단풍이 지면서 옷장 정리를 했습니다. 여름내 입던 얇고 예쁜 옷들은 다른 옷장으로 보내고 가을과 겨울 옷들을 꺼내서 걸었습니다. 옷장에 가득한 옷을 보니 패션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외국말이지만 북한에서도 패션이라는 말을 사용했었지요. 북한 말에 먹은 티는 안나도 벗은 티는 난다는 말이 있죠? 그만큼 북한에서는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옷, 즉 입는 것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었죠.
한국은 옷을 입는 유행이 늘 바뀌지만 어쩌고 보면 돌고 돌아서 요즘은 80년대 복고풍으로 입는가 싶더니 어느새 이것저것 섞여서 자기가 입는 모양이 유행인가 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몸에 딱 붙는 바지를 입었는데 올해부터는 통이 커다래서 다리 세 개는 넉넉히 들어갈 만큼 통이 넓은 바지를 입습니다. 바지 길이도 온 거리를 다 쓸어갈 듯이 길게 끌리게 입더니 지금은 발목에 복사뼈가 보이게 입는다고 하네요. 북한에서 살 때 이런 바지를 절약바지라고 하면서 웃었지요.
이제는 북한에서도 유행이 되었겠지만 한국에 오자마자 반바지를 처음 본 탈북자들이 “어머야, 천이 없어서 바지를 반 잘라서 했는가?” 할 정도로 놀랐다고들 합니다.
북한에서는 몸에 붙는 바지를 쫑대바지라 하고 쫑대바지를 입은 사람들을 길거리에서 규찰대가 서서 단속을 했지요. 지금도 그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패션의 다양함을 단속으로 막으려니 청춘들의 그 열정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을지 싶군요.
북한에서 행사를 하는데 옷이 마땅치 않아서 온 밤을 새면서 손으로 바느질을 해서 윗옷을 만들어서 입었던 기억이 납니다. 옷 만드는 법을 배운 적은 없지만 있는 옷을 내려놓고 따라서 재단을 하고 입어보고 허리 곡선이 없으면 또 다시 바느질하고, 그렇게 만들어 입은 옷을 보고 모두 이쁘다고 누가 만들어주었냐고 물었답니다.
한국에서도 북한처럼 옷을 만들어주는 데도 있지만 보통은 기성복을 사서 입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대형상점들이나 옷가게 같은 곳에서는 입어보고 샀어도 보통 일주일 사이에 옷이 마음에 안들면 반품하거나 환불하는 경우도 있는데 북한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리고 북한에서 미국 천이라고 못 입게 하던 “찐바지” 같은 경우는 한국에서는 청바지, 웃도리는 청자켓이라고 부르는데 이전처럼 마대 같은 천이 아니고 양옆으로 쫙쫙 늘어나서 앉았다 일어나도 활동이 편한 천으로 만들어져서 누구나 두 세개는 가지고 있는 바지이기도 합니다.
올해는 겨울이 유난히 추워진다고 해서 일하는 남편과 아들에게 안에 따뜻하게 담이든 청바지 세개씩 사주었습니다. 청바지를 이야기 하면 슬펐던 기억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2004년에 세 번째로 북송 되었을 때 중국 연길의 어느 길에서 잡혔는데 그때 입었던 옷이 청바지와 청자켓이었지요.
북송이 되어서 온성 보위부로 갔는데 가자마자 청바지라고 바지를 빼앗기고 입고 있던 단벌 옷을 다 빼앗기고 다행이 내의 바람에 앉아 있었지요. 그리고 그후는 여성으로서의 수치스러움이었는가 모든 기억들이 사라졌습니다. 어느 순간엔가 기억을 찾고 보니 저의 몸에는 남루한 겨울 솜옷이 걸쳐져 있었고 바지는 청바지 대신에 여기저기 뜯겨져서 기운 바지를 입고 있었지요. 그래서인지 청바지를 바라볼 때마다 마음 한편은 그때의 기억으로 불편하지만 억지로 잊고 살아야 하기에 애써 외면합니다.
제가 북한을 떠나오기 전에 한참 유행이었던 인민복이 있었는데 지금도 북한 텔레비젼을 한번씩 접해보면 아직도 그 옷을 보게 됩니다. 김정일이 자기의 배가 나온 것을 가려보려고 만들어낸 옷이었는데 그 옷 모양을 전 국민이 따라 입게 되었지요.
한국 패션은 보통 연예인들을 많이 따라갑니다. 그리고 연예인들이 외국 나갈 때는 옷도 공항패션이라고 기사에 나면 어느 사이엔가 젊은 사람들은 그 옷을 따라서 입고 연예인들이 입었던 옷들은 인터넷에서도 불티가 나게 팔리죠. 요즘 사람들은 옷을 어깨선에 맞추어 딱 떨어지게 입던 예전과 달리 오버룩이라고 축 늘어진 옷을 입고 앞 부분을 살짝 바지 안으로 넣기도 합니다.
집안의 옷장도 정리하고 또 사무실에 있던 한복들도 정리하면서 오늘은 무대에서 입었던 드레스도 입어봤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모든 생활규칙들이 다 무너져서 언제 무대에서 입어볼 일이 있을까 생각해보니 아쉬운 마음에 혼자 집에서나마 잠시 입고 멋을 내보았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렇게 많은 옷을 옷장에 걸어두었던 적도 없었고, 회의나 무도회를 한다고 하면 예쁜 옷을 입으려고 강냉이 배낭을 메고 시장에 팔아서 옷을 사 입던 친구들 생각도 나네요. 먹을 것도 없는 곳에서 먹을 것을 팔아서 몸에 걸치고 억지로라도 잘 사는 티를 냈는데 없이 살수록 입는 것에 더 많은 신경을 썼구나 싶습니다.
한국말에 빈티지라는 것이 있는데요. 북한 식으로 말하면 거지 옷 또는 낡고 해진 오래된 옷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예전에 거지들이 바지 단을 미싱으로 박지 않고 입던 모양과 옷도 구멍이 난 것, 덧기운 것들을 멋으로 입는다는 말입니다.
북한에서 한창 예민한 청춘기에 남의 눈을 의식하며 입는 것에 많은 신경을 써가면서 살아왔고, 지금은 한국에서의 넘쳐나는 옷장을 바라보면서 옷에 대한 욕심은 참 고쳐지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끔씩 해봅니다.
우리가 북한에서부터 알고 있던 티는, 입는 것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먹을 것이 풍족해야 입는 티가 납니다. 북한에서도 식의주라고 하던 생활습관을 의식주로 바꿨는데 미공급 시기를 거치면서 다시금 식의주로 전환했다고 들었습니다. 무엇이든지 풍족해야 삶의 질도 윤택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김태희였습니다.
진행 김태희, 에디터 이진서, 웹팀 김상일